우리는 조금 더 불편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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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27개 동 전체 승강기에 ‘배달사원 승강기 사용 자제’라는 경고문을 붙인 적이 있었다. 내용은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니 배달사원(신문, 우유 등)들은 승강기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한겨레신문>에 배달 노동자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는 “우유 상자를 싣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주민이 ‘전기세 내고 이용하는 거냐?’고 따졌어요. 할 말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고개만 숙였지요”라고 답을 했단다. 그 우유와 신문, 너희들 집에 배달하는 거다. 그런데 왜 배달 노동자가 미안해야 하나?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아무리 강남의 잘 사는 아파트라도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사장님은 아닐 것이다. 그들 중에는 노동자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회사에서 ‘갑질’을 당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갑질’을 당하면 인격이 찢어진다. 삶이 통째로 부정 당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왜 배달 노동자들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갑질’을 할까?

이유는 하나다. 회사에서 당할 때의 나는 ‘갑질을 당해도 마땅한’ 노동자인데, 배달 노동자를 대할 때에는 ‘갑질을 해도 마땅한’ 소비자(아파트 주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분리되면 이런 자아분열을 겪는다. 낮 시간에는 을이었다가 밤 시간에는 갑이 된다. 아, 밤에라도 갑이 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로켓배송, 그 편안함의 진실

5월 말 로켓배송으로 유명한 쿠팡에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가 확산됐다. 냉정히 말해 쿠팡은 사고가 안 나는 게 신기한 회사다. 로켓배송이라는 것이 ‘오늘 시키면 오늘 배송해준다’는 개념이다. 내가 직접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오는 게 아닌 한 이게 근본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일을 쿠팡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해냈다. 당연히 무리수가 따른다. 그래서 쿠팡은 수백 명의 노동자를 좁은 공간에 집어넣고 살인적인 노동으로 내몬다. 코로나19가 문제가 돼서 그렇지 쿠팡은 올해에만 벌써 여러 명의 노동자가 과로사로 목숨을 잃은 회사다.

문제는 이런 살인적인 노동환경의 회사가 왜 혁신기업으로 칭송을 받느냐에 있다. 이유는 하나다. 소비자들이 로켓배송을 원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모든 행위가 정당화된다. 대형 유통기업들이 골목상권을 박살낸 뒤 하는 말은 '고객이 더 편한 쇼핑, 더 싼 물건을 원하기 때문'이란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서빙 하는 노동자들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것도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차원이란다.

백화점이나 마트에는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도 부지기수다. 걸터앉을 의자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차원’에서 서서 일한다. 그래서 나는 정말 궁금하다. 소비자로서 나는 정녕 왕인가?

나는 그런 왕이 되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소비자로서 왕 대접을 받고 싶다면, 기자인 나는 내가 쓰는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을 왕으로 모셔야 한다. 그래야 논리가 맞지 않나?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없다. 독자들에게 늘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독자들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인인 나는 이 세상 그 누구의 종도 아니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내 돈 내고 물건을 사 주니 내가 왕이지!”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다. 우리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즉 ‘나’라는 존재에는 소비자와 노동자라는 상반된 두 자아가 공존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소비하는 나와, 노동하는 나는 다른 사람인가? 그게 어떻게 다를 수가 있나? 아무리 분리하려 해도 그건 같은 사람이다. 만약 그 둘이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건 심각한 자아분열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사람들이 욕을 한다. “그렇게 임금을 올리니 물건 값이 비싸지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비하는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노동하는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사장님이 “고객은 왕이니 왕을 모시는 차원에서 물건 값을 반으로 내릴 거야. 그러니 너희들 월급도 반으로 깎아야 겠어”라고 말한다면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1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제네바에서는 보통 오후 7시에 상점 문을 닫는다. 그런데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서 8시까지 영업을 연장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영업시간을 한 시간 더 늘릴지를 두고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24시간 영업점이 널려있는 우리 정서로는 이해가 안 된다. “장사하면서 오후 8시까지도 일을 안 해? 배가 불렀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제네바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투표 결과 영업시간 연장 안은 반대 56.2%로 부결됐다. 그들은 소비자가 오후 8시에도 술을 마실 권리보다 그 상점 노동자들이 온전한 저녁을 누릴 권리를 더 소중히 생각했다.

“제네바 사람들 참 오지랖도 넓네”라고 비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상점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닐지라도 언젠가 내 자녀가, 혹은 언젠가 내 손주들이, 아니, 언젠가 나 자신이 그곳에서 ‘저녁 없는 삶’에 시달릴 수 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모두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노동경제학자인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자신의 책에 이 사례를 소개하며 “이 투표 결과는 정치적 산술을 뛰어넘어 소비하는 나와 노동하는 나가 연대하여 이룬 성취다”라고 적었다.

이 국장의 책 제목이 마음을 울린다. 그의 책 제목은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이다. 정녕 그렇다. 나는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기에 ‘갑질’을 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연대를 하는 노동자로 살아야 한다. 이게 바로 이 국장이 말하는 ‘소비하는 나와 노동하는 나의 연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기꺼이 조금 더 불편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나는 소비자로서 절대로 왕이 아니며, 나의 동료들과 연대하는 한 명의 따뜻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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