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그날, 죽음의 굿판은 누가 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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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잊고 살지만, 올해는 강경대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꼭 30년 전이었던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신입생이었던 강경대 군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백골단의 집단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이에 항의하며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 대 천세용 열사가 잇따라 분신해 목숨을 잃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화가 난 것은 알겠는데 그게 분신까지 할 일이냐?”고 물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열사와 동갑이었던 나는 그들의 심정을 너무나 절절히 이해한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노태우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고, 우리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후배를 지켜주지 못했다. 눈 뜨고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던, 그런 어두운 시절이었다. 

 
 

경박스러운 죽음이라고? 
당시의 일은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상세히 소개됐기에 이 칼럼에서 뭔가를 덧붙이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그 해 5월 5일,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 3면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기고한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 죽음의 굿 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기고문은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고문은 지금도 보수 세력들 사이에서는 ‘명문장(!)’으로 기억되는 글이다. 
김지하는 이 기고문을 통해 “운동권 세력이 조직적으로 분신을 하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이 칼럼 이후 노태우 일당은 “운동권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누가 먼저 분신할지를 결정한다”라거나, “이미 자살 특공대가 결성돼 있고 죽는 순서도 정해져 있다”는 등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퍼뜨렸다. 

결국, 김지하가 깔아놓은 이 비열한 프레임은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의 목숨을 건 투쟁을 무력화하고 말았다. 신문 기고문 하나가 한국 현대사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일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부터 이 칼럼의 한 대목을 검토할 참인데, 오해를 풀기 위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김지하가 변절한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아닌 말로 세상에 변절한 사람이 어디 김지하뿐인가? 
내가 30년 전 이 기고문을 꺼낸 이유는 그가 “당신들은 ‘민중에게서 배우자!’라고 외친다. 그런데 어느 민중이 당신들처럼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리던가?”라며 열사들의 죽음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김지하가 말하는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린’ 이들은 박승희, 천세용, 김영균, 이 세 열사를 지칭하는 것일 게다(이후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 정상순 열사 등 더 많은 분이 목숨을 던졌지만, 이는 김지하의 기고문이 조선일보에 실린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경박스러움은 분명 분신을 말하는 것일 게다. 어느 민중이 그렇게 경박스럽게 몸에 불을 붙이며 목숨을 버리느냐고? 그게 궁금하다니 늦었지만, 김지하에게 그 답을 알려주겠다. 

그들의 죽음 위에 이 세상이 서 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이고 목숨을 끊었다. 그는 화염에 휩싸인 채 평화시장 앞을 질주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했다. 그 전태일은 바로 김지하의 말처럼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렸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인구 4만 명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무허가 노점상을 하던 26세의 젊은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 (Mohamed Bouazizi)가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목숨을 끊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그의 전 재산과 다름없는 손수레를 단속경찰의 손에 잃었던 그 청년은 김지하의 말처럼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렸다. 그리고 그의 ‘경박스러운’ 죽음은 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재스민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2012년 8월 18일, 조국의 독립을 간곡히 열망했던 티베트에서 세 아이의 엄마였던 리쿄 (Rikyo)가 스스로 분신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목숨을 끊으면서도 중국의 압제에 대해 저주 를 퍼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언장을 통해 “세계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티베트어로 말하는 사람끼리 싸우지 말자”는 호소를 남겼다. 티베트에서는 2009년 이후 2012년 말까지 70명이 넘는 민중들이 분신을 시도했고 그 중 54명이 김지하의 말처럼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 로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중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의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상식이다. 
그런데 김지하는 이것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린” 것이라고 정의했다. 김지하는 기고문에서 “생명은 정권보다도 강하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논리대로라면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린’ 이들이 된다. 김지하는 답하라. 죽음을 각오하며 싸워 오늘날 한국사회의 기반이 되어준 그 숭고한 생명들의 죽음은 모두 경박한 것인가? 

도대체 누가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했나? 생명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기에 그 생명을 버 리면서까지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 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 그렇게 생명을 중시한다는 김지하는 1991년 강경대 열사가 맞아 죽을 때, 박창수 열사가 의문사를 당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정권이 그들을 죽였다. 그 천인공노할 ‘죽음의 굿판’이 벌어졌을 때 김지하는 무엇을 하고 자빠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30주년을 맞아 이곳저곳에서 당시의 일을 회고하며 열사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돌아가신 열사들의 이름 앞에 뜨거운 동지애와 무한한 존경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인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 우리가 너무 나 당연시하는 민주주의 권리는 모두 그분들 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부디 어느 곳에서건 모두 평안 하시길. 이 분들의 죽음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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