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수능, 대학 서열화를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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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중고 교사들이 학을 떼는 대목이 있다. 이른바 교원평가제(정식 명칭은 교원능력개벌평가)라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교육 능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해 점수로 환산하는 제도다. 그런데 내가 만난 대부분 교사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 이 제도를 싫어한다.

이 제도를 왜 그렇게 싫어하시냐?”고 물으면 교사들이 적대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 혹시 그 제도를 찬성해? 미쳤어?”라고 반문하는 교사도 있었다.

그들의 설명은 이렇다. 교육이란 교사와 학생의 전면적이고 복합적인 만남인데, 어떻게 몇 가지 기준으로 이를 점수화해 교사를 서열화하느냐는 것이다.

 

무엇을 평가한단 말인가

예를 들어 공개수업으로 교육의 질을 평가한다고 하자. 공개수업 당일 컨디션이 안 좋은 교사는 어쩌라는 건가? 게다가 공개수업으로 교육의 질을 평가하면, 평소 아이들과 전면적으로 접촉했던 노력은 다 허사가 된다. 교사는 오로지 공개수업 준비만 잘 하면 된다.

동료 교사들의 평가로 교육의 질을 평가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런 기준을 정하면 교사는 학생들과의 관계보다 동료 교사와의 관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학교는 기업이 아니다. 교사들끼리의 팀워크보다 교사와 학생들의 공감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학생들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교사가 동료들의 눈치나 보고 있다면 그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돌려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도 옳지 않다. 교사는 때로는 학생들에게 지엄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교육관도 존중돼야 한다. 그런데 이걸 인기투표로 점수화하면, 말 잘 하고, 재미있고, 학생들에게 싫은 소리 안 하는 교사들만 높은 평가를 받는다.

나는 교사들의 이런 불만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교원평가제에 결사반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교사들에게 이렇게 되물었을 때,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교사도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가르침을 단순화해서 평가할 수 없다는 데 100%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점수화해 순위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 배움은 점수화해 그 점수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순위를 매기나요?”

가르침을 점수화해 순위를 매길 수 없다면, 배움도 마찬가지여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12년 동안 이뤄진 초중고 교육의 총체적인 결과를 수능과 내신이라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간단한 숫자로 평가를 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영어와 수학을 잘 하면 뛰어난 인재란다. 영어와 수학을 못하면 열등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학부모 중 영어회화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어를 못하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과연 열등한가?

코쉬-슈바르츠의 부등식이라는 게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매우 기본적인 절대부등식이다. 그런데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 중 이 부등식 이름조차 아는 어른을 난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도 예를 들기 위해 찾아서 외운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부등식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 코쉬-슈바르츠의 부등식을 모르는 나는, 그리고 당신은 열등한가?

내가 이런 말을 방송에서 한 번 했더니 수학 전공자들이 댓글로 수학을 엿도 모르는 놈이 나댄다. 코쉬-슈바르츠의 부등식이 얼마나 중요한데!”라고 댓글을 달더라.

내가 언제 코쉬-슈바르츠의 부등식이 수학에서 안 중요하다고 했나? 당연히 수학에서는 중요하겠지. 내 말은 그게 왜 수학이 아니라, 인간의 우등과 열등을 판단하는 그 중요한 시험의 기준이 돼야 하냐는 것이다.

 

복잡계의 영역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평가할 수 없는 것을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두, 세 가지 팩트를 체크하는 것으로 절대 평가가 불가능한 복잡계의 영역이다.

과학철학에서 복잡계(Complex system)란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서로 얽혀 도저히 단순한 공식으로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을 뜻한다. 그래서 신경세포가 셋만 넘겨도 계산이 불가능하다. 동물이 세 마리만 모여도 발생하는 경우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누가 제일 빠르냐?” 같은 문제는 단순계의 영역이다. 줄 세워놓고 준비, !” 한 다음 가장 빨리 들어오는 사람을 뽑으면 된다. 하지만 누가 가장 뛰어난 인재인가?”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이게 바로 대표적인 복잡계의 영역이다. 이걸 어떻게 두, 세 가지 잣대로 평가한단 말인가? 나는 도대체 우리의 청년들을 고작 18세의 나이에 영어와 수학으로 너는 1등급, 너는 9등급이러면서 한우 등급 매기듯 고기짝 취급하는 만용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수능이 끝났다. 나 역시 수험생을 둔 아빠로서, 아이가 시험을 마치는 그 순간 교문을 지켰다. 청년들이 교문을 빠져 나오는데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마치 인생을 다 잃은 듯 서럽게 운다. 진심으로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도대체 누가 어떤 자격으로 이 청년들을 이렇게 절망에 빠트린단 말인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답은 단 하나뿐이다. 대학 서열화를 없애는 것이다. 한창 꿈을 키우고 배려와 협동을 배워야 할 18세의 나이에 수능이라는 괴물 같은 시험 하나로 인간의 총체성을 평가하려는 무모함을 당장 버려야 한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은 대학에 서열을 두지 않는다. 대학을 나오는 것이 우등한 인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프랑스의 대학 진학률은 40%를 겨우 넘고,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30%를 간신히 턱걸이 하는 정도다. 최고의 교육 강국으로 평가받는 핀란드의 대학 진학률도 40%가량이다. 참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들의 평균 대학 진학률 또한 45%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70%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프랑스나 독일, 핀란드의 교육 수준이 우리나라보다 열등한가? 우리가 비정상인가, 독일과 프랑스, 핀란드가 비정상인가?

진심을 담아 간곡하게 호소한다. 대학 서열화 폐지를 통해 우리의 아이들을 수능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마음껏 누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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