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거대 악에 맞서 연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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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대사를 대표하는 두 진보적 거목이 있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가 그 두 주인공이다.

두 사람 모두 나치가 유럽을 장악한 1940년대 유럽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인 진보적 문학가이자 철학자였다. 또 이 둘은 모두 지하조직 출신으로, 말로만 투쟁하는 지식인을 넘어선 매우 뛰어난 실천가들이기도 했다. 실제 이 둘은 글을 교류하다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됐다. 그리고 당연히도 이들은 사상적 동지가 됐다. 두 사람은 종종 술잔도 함께 기울였다.

그런데 이 둘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끝내 결별했다. 사르트르는 혁명을 위해서는 폭력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카뮈는 어떤 경우에도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실 이 시대에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두 사람이 결코 화해하기 어려운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초반 유럽을 대표했던 두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완전히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계기도 바로 이 주제 때문이었다.

결별 이후 사르트르와 카뮈는 다시는 동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카뮈가 196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르트르는 한 때 동지였던, 하지만 또 한 때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됐던 카뮈의 생애를 그리는 추도사에서 “카뮈는 아마도 나의 마지막 좋은 친구였다”고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를 가깝게 했던 것들은 많았고,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로버스의 동굴 공원 실험

현실갈등이론, 혹은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으로 불리는 이론이 있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무자퍼 셰리프(Muzafer Sherif)의 이론이다.

셰리프가 1954년 실시한 실험의 요지는 이렇다. 평범한 11살짜리 아이 22명을 뽑은 뒤 이들을 두 팀으로 나누고 캠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이 두 팀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았다.

경쟁이 본격화되자 각 팀의 결속은 놀랍도록 강화됐고, 상대팀에 대한 증오도 매우 높아졌다. 사실 두 팀은 그냥 캠프에서 경쟁을 했을 뿐인데, 이들은 빠른 속도로 결집해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고조되면서 밤에 서로의 캠프를 급습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죽여버리겠다”는 위협도 등장했다. 서로의 감정이 너무 고조되는 바람에 실험팀은 예정보다 빨리 실험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실험 기간 1주일). 이게 바로 실험의 1단계였다.

2단계에서 실험팀은 이 두 팀을 다시 한 팀으로 묶었다. 새롭게 한 팀이 된 이들이 과연 과거의 증오를 잊고 원팀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두 팀의 갈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니었는데도 상대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지 않았다. 고작 1주 동안 경쟁했던 사이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 과정을 거쳐 실험팀은 마지막 3단계 실험에 돌입했다. 한 팀으로 섞여있는 이들 앞에 새로운 거대한 적을 등장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공원 관리인이 수로를 끊어버렸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과제를 준 것이다. 끊어진 수로를 복원하는 일은 두 팀이 협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를 미워하던 아이들에게 공원 관리인이라는 더 거대한 적이 등장한 것이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두 팀의 협력이 복원됐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외부의 적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내부의 갈등을 접고 마음을 터놓았다.

더 큰 적을 향한 연대

이 실험의 요지를 정리해보자. 1단계 실험의 요지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서로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팀이 분리됐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할 정도로 미워할 수 있다.

2단계 실험의 요지는 한번 상대를 미워하면 그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움의 감정이 가슴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리 외형상 한 팀이 돼도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한 번 보고 술 한 잔 마시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증오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3단계 실험의 요지는 무엇일까?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서로를 미워해도 더 거대한 적이 나타나면, 그래서 그 적과 맞서 싸울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 연대의 감정이 그제야 비로소 복원이 되는 것이다.

진보운동의 연사를 살펴보면 그 과정에서는 숱한 분열과 연대가 반복돼 왔다. 그리고 그 중 분열의 역사에서는 서로에 대한 증오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내가 운동을 안 하면 안 했지 저 자식들과는 절대 한 편에 설 수 없다”는 말이 거침없이 나올 때도 있었다.

이해한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동굴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한번 상대를 미워하면 그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악감정을 추슬러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그게 언제인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 등장했을 때다. 연대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잊고 다시 힘을 합치기 시작한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과거의 차이를 덮고 연대의 손길을 서로에게 내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위대했던 춧불혁명의 성과는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아 보수정권에 의해 짓밟혔다. 노동자의 권리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국가가 사수해야 할 공공의 영역은 쉴 새 없이 민간으로 이전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의 폭주를 이대로 두고 본다면 한국 사회는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감정을 모두 잊고 다시 공동 투쟁의 깃발을 들어야 할 때다. 생각의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역사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를 가깝게 했던 것들은 많았고,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총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진보진영의 연대와 단결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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